러시아가 서구 사회의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영어로 된 뉴스 웹사이트들을 대규모 선전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가디언(The Guardian)은 21일(현지시간) 보도를 통해, 겉보기에는 평범한 독립 언론이나 지역 뉴스 사이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친(親)크렘린 선전의 통로 역할을 하는 웹사이트 네트워크의 실체를 집중 조명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서방 국가들의 피로감을 자극하고 정치적 분열을 조장하려는 러시아의 정보 전쟁(Information Warfare)이 한층 더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프라우다 네트워크'의 진화: 차단벽을 넘는 트로이 목마
보도에 따르면, 이 웹사이트들은 '프라우다 네트워크(Pravda network)' 또는 과거 '포털 컴뱃(Portal Kombat)'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딥페이크 및 허위 정보 유포 캠페인의 연장선에 있다. 이들의 핵심 전략은 '위장'과 '우회'다.
과거 러시아의 선전 매체들이 스푸트니크(Sputnik)나 RT(Russia Today)처럼 직접적인 국영 매체 간판을 달고 활동하다가 제재를 받은 것과 달리, 이번에 발견된 사이트들은 '런던 크로니클', '보스턴 타임즈'와 같이 서구권 독자들에게 익숙하고 거부감 없는 제호를 사용한다.
이 사이트들은 초기에는 날씨, 스포츠, 연예 등 비정치적인 콘텐츠를 다량으로 게재하여 검색 엔진의 신뢰도를 쌓고 정상적인 뉴스 사이트처럼 위장한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트래픽이 확보되면, 그 사이에 우크라이나 정부의 부패를 과장하거나,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하하고, 서방의 무기 지원이 무의미하다는 식의 친러시아적 논조가 담긴 기사를 교묘하게 배치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러시아가 서구의 정보 생태계 내부에 '트로이 목마'를 심어둔 것과 같다"고 분석했다. 독자들은 자신이 지역 뉴스를 읽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크렘린궁이 승인한 메시지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다.
알고리즘을 속이는 '콘텐츠 세탁' 수법
이번에 드러난 네트워크의 또 다른 특징은 정교한 '콘텐츠 세탁' 기술이다. 이들은 러시아어 원문 기사를 AI(인공지능) 번역기를 통해 영어로 빠르게 변환한 뒤, 서구권 독자의 정서에 맞게 문체를 다듬어 재배포한다.
특히 이 웹사이트들은 서로를 인용(Cross-linking)하거나, 소셜 미디어의 봇(Bot) 계정을 통해 기사를 퍼 나르며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의 알고리즘을 속여 검색 결과 상단에 노출되도록 유도한다. 이는 정보의 출처를 세탁하여 독자들이 해당 뉴스가 러시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가디언은 이러한 사이트들이 단순히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것을 넘어, 미국과 유럽의 선거 시즌에 맞춰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쏟아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이민자 문제나 인플레이션과 같은 민감한 사회 이슈를 러시아에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유권자들의 불만을 증폭시키는 식이다.
서방 정보 당국과 사이버 보안 업체들은 이러한 네트워크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도메인을 바꿔가며 우후죽순 생겨나는 복제 사이트들을 실시간으로 모두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번 사태는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이 허위 정보 필터링 시스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러시아의 이러한 전방위적인 사이버 심리전은 물리적인 전쟁만큼이나 서구 민주주의 시스템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뉴스의 출처를 검증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독자들의 미디어 리터러시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